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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사물

영화평론가 김영진 - 내가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


영화를 스크린으로 봐야 진정으로 맛을 알 수 있다고 하는 대개의 말은 거짓이다. 사실, 대다수 흥행작은 비디오나 DVD로 봐도 전혀 감흥을 받는데 지장이 없다. <매트릭스>시리즈와 같은 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는 스크린에서 보는 것보다 홈시어터를 통해 DVD로 보는 것이 더 큰 흥분을 주기도 한다. 여기에 예외가 있다면 영화라는 매체를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게 된다는 것을 아예 상상할 수 없었던 무성 영화, 또는 텔레비전이 따라 올 수 없는 스크린 사이즈로 관객을 압도하는 고전 영화들이다.

나는 구식 영화애호가는 아니며 솔직히 극장에 가는 것보다는 컴퓨터 모니터로 영화 보는 걸 더 즐기는 게으른 영화평론가에 가깝다. 하지만 때로 영화를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크린에서 확인하는 감동의 실체를 경험할 때라고 믿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였다.

지금은 개보수해 멀티플렉스로 변신한 구 대한극장은 한때 동양 최대의 객석을 보유한 대형 극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 극장은 70밀리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대형 스크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헐리기 직전 마지막으로 상영한 70밀리 영화가 바로 <아라비아의 로렌스>였다.

6년여 전 이 영화를 70밀리 스크린으로 본다는 역사적 체험에 흥분한 필자는 구닥다리 영화를 굳이 왜 보느냐는 후배들을 꼬드겨 함께 극장에 갔다가 생전 처음 대형 스크린이 주는 영상과 사운드의 압도적인 감동에 취한 그들이 극장을 나와서 잠시 비틀거리는 것을 봤다. 돌비 서라운드 스테레오로 청각을 홀리지 않고도, 원래 재료가 갖고 있는 이미지의 깊이만으로도 젊은 관객들을 취하게 만들 만큼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대단한 유혹을 발휘했던 것이다.

짧은 도입부가 끝난 후, 피터 오툴이 연기하는 주인공 T.E. 로렌스가 낙타를 타고 사막에 들어서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초반 장면은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말로 형언하기 힘든 감정의 부피가 그 대형 화면에 녹아 있었다. ‘생각하는 인간의 서사시’란 평을 받은 이 영화에서 사막의 풍광을 70mm 화면에 잡아내 보여주는 장관은 지금 봐도 강력한 시각적 호소력을 갖고 있다. 생생한 사막의 색채, 모래의 질감과 형태 변화, 바위와 절벽의 절경, 대지의 이글거리는 지열로 강한 느낌을 남기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진정한 주인공은 사막의 풍경이다.

고요히 비어 있는 사막, 사막 위로 떠오르는 태양, 모래 바람이 훑고 간 사막의 흔적은 몰아의 쾌감을 주는 시각적 경이를 통해 모험에 가득 찬 주인공 로렌스의 삶을 매혹으로 꾸민다. 그것을 두 말 없이 보여주는 것이 사막의 풍경이었다. 스타도, 여자도, 러브 스토리도 없지만 이런 것이 영화가 무엇인지 입증하는 고전의 묘미다. 영화가 진정으로 영광스러웠던 시대의 기념비적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위대한 명화라고 하는 것은 무성 영화 시대의 매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리가 없었던 시절, 오로지 보여주는 것만으로 모든 표현을 처리해야 했던 무성 영화 시대는 영상의 깊이가 가장 고차원에서 발휘된 시대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여전히 날카로운 문명 비판 정신을 담고 있는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는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마찬가지로 본다는 것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담배꽁초를 주워 피우던 찰리가 피운 담배를 뒤로 휙 던지고 뒷발로 우아하게 내차는 행동은 누구에게나 견딜 수 없는 웃음을 안겨 준다.

대공황 이후 대량 실업과 대량 기계 생산이 겹쳐지는 1930년대가 배경인 이 영화가 시작되면 ‘공장 노동자’로 소개되는 찰리는 단조롭고 비인간적인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옆에서 반쯤 미친 채 볼트와 너트처럼 보이는 것은 뭐든지 조이는 행동으로 공장을 발칵 뒤집어놓는다. 우리의 불쌍한 찰리는 중년 남자 동료의 러닝 셔츠 위로 비치는 젖꼭지, 사장 여비서의 옷 뒷자락에 달려 있는 단추를 향해 스패너를 들고 돌진한다.

<모던 타임즈>가 오늘날에도 감동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메시지 때문이 아니라 매우 단순한 시각적 설정만으로도 폭넓은 함의를 펼치는 채플린의 시각적 화술 때문이다. 영화 초반, 공장의 톱니바퀴에 낀 찰리의 모습은 어떤 구구절절한 말로도 도달할 수 없는 현대 노동자의 슬픈 초상을 가리킨다.

결국 영화를 사랑하는 가장 좋은 체험은 영화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시각적 특질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즐거움에서 시작된다. 그것도 스크린으로.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나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스크린으로 보기 전에 이미 비디오로 수차례 본 영화였음에도 극장에서 보자 몰랐던 감동을 내게 되살려줬다. 이게 순전히 개인적인 체험이라면 별 할 말이 없지만 나는 역시 영화의 진짜 감동은 극장에서 봐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쪽이다. 


 영화평론가   김영진

내가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